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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문] 굼뜬소 타령
글 쓴 이 :  송광익 등록일 :  2011-03-14 16:01:31 |  조회수 : 1331

 

 천생 송아지이로소이다. 아버님 날 ‘송가(宋哥)’로 낳으시고, 소띠 동갑이신 어머님 몸을 빌려 ‘아지’로 길러졌으니, 부모님이 아니셨으면 이 몸이 어찌 있었을꼬. 쇠코뚜레를 떼어버리고자 하여도, 하늘 아래 벗어날 길이 없더이다. 고고의 첫소리를 채 기억할 도리야 없지만, 혹여 음매 소리가 아니었을까도 싶습니다. 송아지 형제끼리 오종종 모여 살던 외양간을 벗어난 초등학교의 음악 시간을 막 마친 뒤였지요. 수업을 마치면 곧장 사방팔방으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달음박질치던 친구들이 그날따라 제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방금 배웠던 노래를 입 맞추어 복습하는 신통방통한 광경이었습니다. 그제야 그 노랫가락이 바로 ‘얼룩송아지’이고, 이 몸이 미처 잊고 지냈던 탄생 내력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머리가 점차 굵어지면서 듣는 귀만큼이나 놀리는 입도 시나브로 열없어서, 가끔씩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별명쯤으로 물러앉더군요. 불러주는 이가 없는 이름을 저 혼자서 ‘아지(我知)’라고 새기면서, 먼 바다 건너 먼 옛날 소크라테스 영감님 흉내를 내어 ‘나 자신을 알자!’라며 호기를 부려보기도 하였습니다.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바빴던 시절도 지난 어느 날, 컴퓨터 통신망에서 무척이나 반가운 이름이 눈에 띄었습니다. 대학 신출내기 때 먼발치에서 아련한 전설인 양 바라만 보았던 문학동아리 선배님이었습니다. ‘늦되는 나무’라는 필명을 쓰시더군요. 미운 놈 고운 데 없고 고운 이 미운 데 없다고, 모든 것이 그저 살갑고 마냥 정겨웠습니다. 새삼스럽게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은 어쭙잖은 마음에 그냥 ‘굼뜬 송아지’라고, ‘게으른 후배 놈이 뒤늦은 인사를 올립니다.’ 쯤으로 맞장구친 셈이었지요. 한동안을 늦되는 나뭇등걸에 기대고 비비대며 마흔 고개를 넘자니, 문득 스스로가 열없고 멋쩍더군요. 예전에 딸애에게 예쁜 지혜를 뜻하는, ‘아지(雅智)’라고 살짝 바꾸어서 이미 물려준 바도 있고 해서, 뒤통수나 긁적거리며 ‘굼뜬 소’로 바꿀 도리 밖에는 없었지요.

꿈보다 해몽이라고, 뭔 뜻이라도 있냐며 물어오는 주변 분들에게 매번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보다는 아예 그럴듯한 해몽을 들려주기가 수월할 때가 많았습니다. 제 의지와는 무관하게 물려받은 본디 이름과 달리 호는 본인이 짓고 고를 수도 있는 적극적인 자기표현의 방법이라고도 하니깐 말입니다. 불가(佛家)에서 소를 사람의 진면목, 즉 본디 참모습이라고 하지요. 절집 담벼락에서 곧잘 만나는 심우도(尋牛圖)는 바로 본성 회복의 길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것이지요. 호랑이 등짝에 매달려서 애초에 어디로 향해, 혹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서, 정신없이 숨가쁜 세상에서 가끔씩은 한숨이나 돌려보자고. 뒤도 돌아보고 옆도 챙겨보면서, 좀 천천히 걸어가 보자고. 앞만 보며 허겁지겁 달려오노라 저도 몰래 내팽개치고 온 넋이라는 놈이 뒤따라올 짬이라도 주게 말입니다. 느릿느릿 걸어도 황소걸음 흉내라도 내보자라고 너스레를 떨곤 합니다. 해몽이 길어지고 거듭되다 보면, 제 풀에 제가 취해서 엇갈릴 때도 있습니다. 진작 그런 속내가 있었음을 미처 눈치 채거나 기억하지 못했을 뿐, 정말 그런 꿈을 꾸었던 건 아니었을까? 얼뜬 놈의 속보이는 착각이자, 제 나름대로의 발버둥이겠지요.

우두구육(牛頭狗肉)이라, 실은 소머리에 개고기가 딱 제 신세인 셈입니다. 개띠인 몸뚱이에 소 탈바가지만 뒤집어씌운 꼴이니까요. 개 꼬리 삼 년 묵어도 족제비 꼬리털 될 리야 만무하겠지만 기왕에 뒤집어쓴 탈, 어디 한 번 용이나 써보자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어떤 사물이나 성질들을 구분 짓기 위하여 이름을 붙이곤 하지만, 붙여진 이름으로 하여 어떠한 사물이나 성질로 길들여지기도 한다니까요. 곧잘 이런저런 다짐이나 소망까지 담아서 스스로 이름을 붙이기도 하더군요. 평소 흠모하던 신영복 선생님의 아호가 ‘쇠귀’이더군요.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당최 알아듣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스스로에 대한 겸허와 경계의 뜻으로 삼고자 하는 당신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들리는 소리에만 안주하지 말고, 더 너른 세상을 향해 귀를 열고, 낮은 곳의 모든 사소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자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모습이 새삼 아득하고 자꾸만 부끄러워집니다. 우선은 성마른 개 몸뚱이에서 우직한 소머리까지 이르는 노정만으로도 숨이 차고 막막할 따름입니다.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더라도, 설령 가도 가도 끝내 닿지 못하더라도 굼뜨게나마 꾸역꾸역 나아갈 도리밖에는 없지요.

‘너 커다랗게 뜬 검은 눈에는/ 슬픈 하늘이 비치고/ 그 하늘 속에서/ 내가 산다// 어리석음이 어찌하여/ 어진 것이 되느냐// 때로 지그시 눈을 감는 버릇을/ 너와 더불어/ 오래 익히었구나.’ (김종길의「소」전문) 제 버릇 개도 못 준다는데 개 같은 마음 어디에다 버리겠습니까마는, 아직 개기름 덜 가신 욕심이나 애꿎은 부아로 저 혼자 소가지를 끓일 때 무슨 용한 주문인 양 외워보고는 합니다. ‘어리석음이 어찌하여 어진 것이 되느냐?’라는 구절을 화두 삼아서, 소 찾아 나선 까까머리 동자승 흉내로 온 산을 헤매고 있습니다만, 가도 가도 적막강산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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